안녕세대가 386세대에게 고한다.

[계간 ‘오늘의교육’ 2014 1&2월/18호]

안녕세대가 386세대에게 고한다.

김환희

본 논고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전체의 지형자체가 변형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좌파프레임이 무효화 돼버렸다고 간주한다.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민주화운동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단절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운동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386세대들은 그 단절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저기 괴물이 있다.”라고 과거에 숭고‘했’던 대의(기의/메세지)를 외치지만 끓어오르는 정의감으로 반응해야할 88만원세대들이 보는 것은 오히려 괴물과 싸우다 어느새 괴물을 닮아버린 그들의 꼰대적인 정서(미적 감각/스타일)뿐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 즉 이를테면 피아를 구분하는 방식,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 대중을 이해하는 방식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현시대를 다르게 분석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이곳의 시대정신1)을 담지하는 주체들을 추적해보는 것이다.

사투르누스_고야 진격의거인

(그림1, 2) 아비에게 잡아먹히느냐, 자식들에게 잡아먹히느냐

오른쪽 그림은 고야의 <사투르누스>라는 작품이며, 왼쪽 그림은 일본과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 작품의 영화포스터이다. <사투르누스>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투르누스는 하늘인 우라노스와 땅인 가이아가 만나 낳은 막내아들이며,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예언자가 사투르누스에게 그의 자식 중 하나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불안한 마음에 아내인 레아가 아이들을 낳자마자 자신의 아이들을 삼켜버린다. 한편 <진격의 거인>은 인류의 가상적인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어느날 인간을 잡아먹는 다수의 거인(신인류)이 출현하고 구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삼중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벽 안에서 사는 것으로 일시적인 안전을 얻게 되나 끊임없이 위협에 처한다. <진격의 거인>은 연재직후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2013년12월 기준으로 2800만 부의 판매실적을 기록하며 만화왕국인 일본에서조차 전무후무한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에서도 포탈사이트 daum이 2013년 올해의 검색어1위로 선정할 정도로 센세이션한 반응을 불러왔다. 이는 오타쿠들의 집단무의식, 더 나아가 한일양국의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절망적 고립감을 심리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시대는 항상 전 시대의 피를 먹고 자라난다. 이른바 우리는 주체로서 독립되어가며 모두 ‘부친살해’의 욕구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세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려하는 아들들의 필연적인 욕망이 바로 시대정신인 것이다. 나는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시대정신을 담지한 주체들이 2002/2008년 촛불세대와 일베2) 그리고 2013년 ‘안녕’세대라고 생각한다. 즉 역사의 종언이라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에 따라 모던적 ‘아비’의 언어로는 이해되지도 소통할 수도 없는 ‘자식들’이 갑자기 출몰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유형을 기존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신인류’라고 명명하고 지금부터 그 차이점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신인류는 누구인가?

신인류가 ‘모던보이/걸’들과 대비되는 점을 표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인류의 특성
㉠ ‘거대서사’가 누락된 스타일리스트㉡ ‘엄숙주의’를 넘어선 유희왕㉢ ‘전위주의’를 거부하는 평등주의자㉣ ‘도덕주의’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

‘거대서사’가 누락된 스타일리스트

신인류는 역사 속에 나의 위치를 해석해줄 “거대서사가 없이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인간”3)이다. 즉 신인류는 거대서사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엄숙하게 수행하는 것이 아닌, 개인적 삶의 자족적 만족이라는 미시담론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미시담론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의식과 같은 상징적 대타자의 질서가 아니고, 사적 즐거움(私心)이라는 감성적 가치이다. 따라서 인물평가에 있어서 ‘진정성주체’4)는 그 사람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느냐에 대해 ‘대의’라는 잣대로 판단한다면, 신인류는 그 사람이 어떤 ‘스타일’을 선택했느냐에 대해 ‘미학적 감각’이라는 잣대로 판단한다.

‘엄숙주의’를 넘어선 유희왕

진정성주체의 인생은 대의라는 역사적 판단에 의해서 판결되기 때문에, 그들은 한없이 비장하고, “병적일 정도로 진지”5)할 수밖에 없다. 마치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적의 본진에 잠입하는 홍콩 느와르 액션물의 영웅들처럼,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독재자라는 단단한 바위에 내던져 균열을 도모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인류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자족적 만족감이므로, 그들은 대의라는 거추장스러운 무게추에서 벗어나 한없이 가벼울 수 있다. 오히려 신인류에게 진지함이란 나의 사적 즐거움을 억압하는 방해요소처럼 느껴지므로, 그들에게 진지한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처럼 기피되고 만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의 불운한 개인사마저도, ‘병림픽’6)과 같은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시켜버릴 만큼 타고난 유희왕인 것이다.

‘전위주의’를 거부하는 나르시스트

진정성주체들은 필연적으로 거대서사나 대의와 같은 대타자적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지적인 선생(이데올로그)들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을 계몽시켜, 사회가 실제로 돌아가는 현실(실재계)에 대해서 각성하게끔 하는 사람, 이른바 ‘전위’(vangauard)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반면에 신인류에게 전위라는 계몽가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미학과 감성의 영역은 개인 내면에 존재한 호불호의 취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가치지향을 객관적으로 판단 내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을 계몽하려하는 엘리트들에게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가진다. 그들과 나는 평등한 위치에 서있으며, 누구도 자신의 ‘미적 감각이라는’ 무의식적 판단보다 우위에 서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주의’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

진정성주체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선악 이분법적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그들이 “타자와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정립하는 헤겔적인 주체”7)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과거의 운동은 정치적 적을 절대적 악의 현현으로 선언하고, 이에 대한 의로운 저항을 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강박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적대의 정치’는 결국 “적을 단순화-일원화하고,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자기편도 집중과 통제를 통해 군사조직과 비슷한 균질적인 것으로 환원해”8)버린다. 여기에서 인민들을 동질화시키는 테크닉을 갖춘 이론가, 활동가 전위들의 지휘가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반면에 신인류는 타인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개취존’9)이라는 에티켓을 중시하므로, 최소한 도덕적 선악구도를 노골적으로 내세우진 않는다.10) 오히려 “옳고 그름에 대한 천부적인 도덕관념을 부여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참꼰대’들을 접하고는 운동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11)

사도2호 사도15호

(그림3, 4) 사도들은 왜 반복해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인가?

사도(使徒, Angel)는《신세기 에반게리온》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가공의 존재로, 사해문서의 예언에 따라 지구에 출몰하는 생명과 물질의 경계조차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각각의 사도의 이름은 사해문서에 근거해서 붙여져 있으며 사도들끼리 연계를 하여 습격하는 일은 없고, 언제나 단독으로 쳐들어온다. 사도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취한 존재라 불리며, 인간에 비해 월등히 강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애니메이션 3화에서 등장한 제 4사도 ‘샴셀’을 섬멸했을 때 사도의 신체가 그대로 남아 샘플을 채취할 수 있었는데, 아카기 리츠코에 의하면 “인간의 유전자와 상당히 유사하다”라고 한다. 이는 사도가 또 다른 인류임을 증명한다. [위키백과 참조] 오른쪽 그림은 제2사도인 ‘릴리스’, 왼쪽 그림은 제15사도인 ‘아라엘’이다.

첫 번째 사도, 촛불주체.

이러한 신인류가 정치사회학 지형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2년 촛불집회였다.

촛불시위는 전위들의 의식화교육과 지휘를 통해 체계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신인류의 자발적 각성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발생하였던 저항운동이었다. 인터넷이라는 수평적인 네트워크공간이 이러한 운동이 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예시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인터넷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며 즐길 수 있는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상세계는 ‘너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라’는 명령을 개인들에게 끊임없이 내리게 되고, 이러한 자기표현의 욕구가 가상을 넘어 현실사회로 넘쳐흐르게 된 것이 2002년의 월드컵과 촛불집회였다. 각각 개성넘치는 붉은악마 스타일로 대한민국을 응원하던 개인들의 정동은 이내 스포츠라는 매개물 없이 광장으로 직접 난입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촛불집회의 ‘기의’가 아니다. 신인류에게 촛불집회가 주는 유일하게 중요했던 메시지는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평등하게 내지를 수 있는 ‘수평권력’적 카니발이 인터넷을 넘어 지금 이곳에 열렸다는 것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이 직장이나 가정,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던 발언들을 인터넷과 광장에서 외치며” 해방감을 만끽했던 것이다.12)

두 번째 사도, 일베.

이른바 촛불주체를 탄생하게 만드는 데, 인터넷이 일종의 모태역할을 했다면, 촛불주체가 어떤 계기로 인해 체세포분열하면서 탄생한 것이 일베이다. 즉 일베는 촛불주체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쌍생아이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촛불주체와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 대해 박가분은 흥미로운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다.

“여기서 어느 집회 풍경을 떠올려보자. 광장에 모인 촛불시위 인파들 중에서 조직 단위에서 동원된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SNS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나온 사람들이 더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촛불시위는 처음에는 신선한 경험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동감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구호들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렇게 ‘군중 속의 고독한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할 때 어느 순간 촛불의 이상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13)

앞서 다룬 바와 같이 신인류는 기의가 아닌 기표에 반응한다. 따라서 기표에만 반응해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운동권이 이야기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체들의 시사상식수준과 정치적 지향의 강도에 따라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의 층위가 나뉘었던 것이다. 그것은 발언권을 둘러싸고도 벌어진다. 2008촛불집회에서 실제로 목격한 장면인데, 어떤 남자가 연대발언이 이어지는 대중들의 자유발언대 위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외쳤다. “촛불집회 이거 축제의 장이지 않느냐, 그러니 진지한 애기, 무거운 애기는 고만하고, 이제 가볍고 재밌게 노는 애기를 해봅시다!” 그리고 그 발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다소 쌀쌀했고 야유에 가까웠다. 나는 이 남자에게서 ‘개념없음’을 본 게 아니라, 어떤 진화의 징후를 발견했다. 촛불집회의 여러 요소들 중 축제라는 기표에만 선별적으로 반응하는 스타일리스트, 한없이 가벼워지고자 하는 유희왕, ‘개념있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감각화를 실현하는게 중요한 나르시스트, 남들과 비슷한 류의 말을 하기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라는 신인류적 요소가 좀 더 명확하고 뻔뻔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진화한 존재(일베의 시초)들은 촛불주체들에 대해서 이중감정을 품게 된다. 한편으론 유희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촛불집회의 카니발적 해방구를 맛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시위현장에서 그들과 이질감을 형성하며, 해방구에서 인터넷 상(DC와 일간베스트)으로 다시 쫓겨난 후 촛불주체에 대한 시기심을 일종의 트라우마로서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느꼈던 ‘이질감’이야말로 ‘실제계’와 ‘촛불주체’가 괴리되어 있다는 감각적 증거라고 여긴다.14)  여기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眞각성으로서의 2차각성(촛불주체로서의 1차각성, 촛불주체를 거부하는 2차각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좌파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주입하는 빨간약15)은 진실을 호도하게 하는 위약이며, 그들의 속임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서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적 주체16)들이 적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거울적 주체’로서 정립시켜 나가는 과정을 일베 또한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즉 일베가 ‘안녕들하십니까’대자보를 훼손하는 행위 이면에는 이러한 심리가 놓여있다. 대중들이 좌파전위들이 제공하는 가짜약에 의해 좌파좀비로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베저장소 캡쳐

(그림5) 일베라는 빨간약?

위 그림은 일간베스트 홈페이지를 한 일베유저가 남길 글을 캡쳐한 사진이다. 빨간약을 삼킨 이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비유는 지젝 등 좌파진영에서 새로운 저항주체의 각성을 암시하기 위해 많이 쓰였는데, 흥미롭게도 일베 이용자들도 이를 전유해서 사용하고 있다.

안녕세대? 세 번째 사도.

안녕사태는 모두가 예감하고 있듯이 촛불주체 이후 다시 새로운 저항주체가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이다.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 이제 이데올로그들은 사람들을 담론의 장에 직접적으로 인셉션17)시키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촛불주체는 인셉션을 위해서 전위라는 매개자를 필요로 하진 않았지만 ‘광우병 파동’ ‘미선이효순이 사건’ ‘노무현 탄핵’ 등의 매개적 사건이 필요했다. 그러나 안녕사태는 외부의 트리거 없이도 저절로 발생했다. 이른바 자가각성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과거에 몇몇 청춘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외침은 힐링전문강사들의 위로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꼰드롤18)로 잠잠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안녕하지 못하다’는 한 청년의 외침에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는 이곳저곳에서의 메아리는 문제가 개인이 아닌 구조에 있다는 진실을 각성시켰다. 이제 이러한 대중의 각성들을 구조를 개편할 동력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안녕세대의 다음 행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다음 행보가 단지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를 선언하거나 특정 정권을 성토하는 수준에서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불집회는 ‘반이명박, 미국산소고기수입반대’와 같은 단일한 구호로 잡민19)들의 다채로운 목소리를 통일시킴으로써 운동의 주도권을 역설적으로 정권의 의지에 넘겨주고 말았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우리 내면의 권력화 된 행동양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미처 고민해보지 못한 것이다. 막말로 “철도민영화만 막는다고 우리가 안녕해질 것인가?”20) 아니면 박근혜가 전격적으로 사퇴한다면 우리가 안녕해질 것인가? 99퍼센트의 을을 핍박하는 1퍼센트의 갑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안녕해질 것인가? 이 사회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남아있다면, 현재의 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한다 해도 새로운 권력자가 우리 중에 나와 예전의 권좌에 연이어 앉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박근혜정부 성토보다 내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이다.

“현대적 용어로서 사유화는 관할권-재산-용역-철도-수도-경찰-교육 등의 권한을 민간 부문과 변덕스러운 시장에 맡기는 것을 뜻하는 경제 용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사유화는 ‘우리가 서로를 보살피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욕망의 사유화, 상상력의 사유화 없이는 불가능하다.”21)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준비가 되어있는가? 자본이 주입한 소유욕망과 불안의 정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욕망과 연대의 정동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가? 정말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렇다면 ‘진정성주체’들아, 우리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외침을 서둘러 당신들의 메세지에 통일시키려 하지 말라. 또한 우리의 요구사항을 몇몇 악인의 얼굴을 가진 권력자를 물러나게 한 이후로 유예시키지 말라. 먼저 우리의 목소리들이 당신 내면의 권력지형과 닿아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지금 이곳에 만드는 시위현장에 혁명이후의 유토피아가 예시적으로 도래하게 하자.22) 안녕세대가 일베와 같은 어둠의 사도가 되어 다시 찾아오는 일만은 피해야 되지 않겠는가.

[미주]

1) ‘시대정신’은 문자 그대로 어떤 특정 시대를 풍미한 감정 상태와 사고 경향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는 헤겔의 정의를 따른다. 그는 시대정신을 “역사의 과정과 결부시켜 그것을 개개의 인간정신을 넘어선 보편적 정신세계가 역사 속에서 자기를 전개시켜나가는 각 과정에서 취하는 형태”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2) 일베는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인터넷 유머 커뮤니티이다. 가입자 수만 해도 백만 명에 육박하고 동시 접속자 수는 평균 1~2만 명이다. 일베는 국내 최대 유머사이트인 동시에 뚜렷한 보수우파의 정치성향을 띤 인터넷 커뮤니티다. 일베는 그동안 공격적이고 과격한 언행으로 인해 자주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일례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코알라와 합성한 사진(일명 노알라)을 컴퓨터 매장에 진열된 화면을 띄운다든가, 시위에 나선 여성의 신상을 털고(인터넷에서 개인정보를 해킹하여 퍼뜨리는 행위) 성추행성 발언을 해왔다. [박가분,《일베의 사상》, 2013, 8~9쪽.]

3) 김홍중,《마음의 사회학》, 2009, 410쪽.

4) 김홍중은 ‘진정성의 주체’를 “전근대적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는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윤리적인 주체라고 본다. 진정성은 저항세력에게 있어 하나의 이상적인 윤리 모델이며 주체모델이었던 것이다. 물론 진전성 모델은 전근대적 도덕 모델인 신실성과 비교하자면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는 근대적 삶의 태도로의 변화를 함유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언제나 특정 공동체의 정치적 프로그램과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규율권력에 대하여 음각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진정성이 “언제나 저항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개인에게는 규율권력에 따르냐 혹은 진정성의 주체화를 택하냐의 2지선다형적인 답만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김승환.《신자유주의시대의 공공성 위기와 새로운 운동주체의 도래》. 2013, 38쪽.] 이 논고에서는 ‘진정성주체’라는 의미를 386운동주체의 특성을 집약한 명칭으로서 사용한다.

5) 김홍중,《마음의 사회학》, 2009, 43쪽.

6) ‘누가 누가 더 병신같은지, 더 불행한지를 가리는 올림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갤러리에서 자신의 인터넷 게시물을 차별화하고 더 웃겨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막장으로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조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표현 양태는 인터넷 커뮤니티 상주자들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지칭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잉여인간으로서 자신의 한심함과 막장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은 다른 인터넷 잉여들과 차별화되게 하는 동시에 다른 잉여들에게 ‘이만 하면 나는 정상이야’라는 안도감을 주어 묘한 호혜적 동류의식을 얻는다.” [박가분,《일베의 사상》, 2013] 여기서 ‘병신’이라는 용어 자체가 장애인들을 배제하고 비하하는 의미로서 사용된다는 측면에 있어서 ‘일베’의 소수자혐오와 맥락이 닿는 부분도 있다.

7) 김홍중,《속물과 잉여》, 2013, 48쪽.

8) 김승환, 《신자유주의시대의 공공성 위기와 새로운 운동주체의 도래》. 2013, 48쪽.

9) ‘개인적 취향을 존중해주세요’라는 인터넷 약자.

10) 물론 신인류들도 미학적 판단기준에 의해서 타자에 대하여 혐오나 안티의 정서를 가지게 되고  이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의 ‘호오’의 문제인 것이지, ‘옳고 그름’의 객관적 판단 영역이 아닌 것이다.

11) 김홍중,《속물과 잉여》, 2013, 41쪽.

12) 박가분,《일베의 사상》, 2013, 235쪽.

13)같은 책, 249쪽.

14)논리적 정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부인당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존재도 용납가능하고 무슨 의견이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장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배신당한 것이다. 즉 자신의 ‘부인당함’ 자체가 촛불집회가 잘못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일베가 공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했던, ‘정치적 의도성’이다. 진정성주체가 만들어놓은 선악구도의 세계에서 ‘악인’으로 자리매김된 존재를 옹호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선악구도 자체에 균열을 가하고자 한다.

15)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1》에서 매트릭스에 대항하는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의 약을 택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유래했다. 파란약을 먹으면 그대로 매트릭스 시스템(기존의 거짓된 시뮬레이션 사회)에 안주하게 되고, 빨간약을 먹으면 거짓된 세상에서 깨어나 진짜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16)‘트라우마적 주체’는 필자의 논문《신자유주의 시대의 공공성 위기와 ‘새로운 운동주체’의 도래》에서 정의되고 사용된 개념이다. 소수자운동에 대한 현장연구를 하던 도중에 소수자 정체성이 다수자에 대한 증오를 기반으로 트라우마적으로 형성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이 경우 정체성정치가 ‘적’을 명확히 상정해놓고 그 적에 대한 ‘거울상’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함으로써 성립해 나갔던 것이다.

17) 인셉션(inception)은 동명의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영화에서 ‘타인의 꿈 속에 들어가 계획된 생각을 심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나는 이 용어를 실재계와 상상계를 연결시킨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다. 즉 시스템의 문제를 한 눈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적절히 해석할 수 있게끔 해주는 안내지도(map)가 필요하다. 이러한 지도역할을 하는 ‘담론의 장’과 접속하는 과정을 ‘인셉션’이라고 명명했다.

18) 꼰대와 control의 합성어. 꼰대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청(소)년들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행하는 mind-control을 일컫는 말이다.  청소년활동가들(10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이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19) ‘the people’을 지칭하는 용어. 화자의 의도에 따라 ‘인민, 민중, 다중, 대중, 시민’이라는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쓰이기도 한다. ‘잡민’에는 일자적 가치를 가진 집단으로 통일되지 않는 특성을 강조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20) “철도민영화가 저지된대도 청소년의 인권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청소년들은 안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청소년의 안녕대자보 중에서.

21) 레베카 솔닛,《이 폐허를 응시하라》, 21쪽.

22)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는 아나키스트인 데이비드 그레이브가 처음 이론화한 개념으로 “의도적으로,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사회와 비슷하게 조직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특히, 그레이버는 기존의 혁명운동에 대해 ‘정치기구의 통제권을 장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하려고 한 다양한 시도’가 실패했다고 보면서, ‘낡은 사회의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시적 정치를 통해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거나 ‘혁명가의 책무는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일이다’라고 하는 사고를 거절하면서, ‘지배기구의 실태를 폭로하고, 그 부당성을 밝혀내며, 해체하는’ 한편 거대한 ‘자율적 공간’을 획득하여 ‘참가형 운영’을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예시적 정치란 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자들이 타도해야 할 적들의 제도(국가권력)를 모방하여 스스로 제도를 형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운동을 형성하는 집단의 집합성 속에서 이미 ‘지금 이곳에서’ 해방된 관계성을 형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적 결의를 갖는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해방운동이 역사적으로 반복해 왔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자기기만과 단절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로부터 터져 나온 요청”인 것이다. [김승환, 《신자유주의시대의 공공성 위기와 새로운 운동주체의 도래》. 2013, 30쪽.]

[자기소개]

김환희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seven99teen@hanmail.net

세상을 알기 위해서 휴직하고 상경해서 사회학과 대학원, 수유너머, 다지원, 빈집, 만행, 여러 시위현장과 거리에서 생활하고 놀며 공부했습니다. 386같은 참꼰대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자의식과 교실 안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신인류’들을 이해하기위해 시작했던 공부의 결과물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공성 위기와 새로운 운동주체의 출현’이라는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현재는 복직해서 학교에서 일하면서 인권오름, 수유너머위클리, 진보평론 등에 글을 기고하며,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의 활동가로서 살고 있습니다.